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로이 전쟁 (문단 편집) === 베일을 벗지 않은 부분들 === 고대 그리스인들마저도 여자 때문에 전쟁난 걸 못마땅해 했으며 [[투키디데스]]의 경우 경제활동 등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설을 내세웠다. 거기다가 트로이가 함락된 원인도 그리스인들의 공격 때문에 성벽이 무너진 건지 지진이 일어난 건지도 불분명하다.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이유도 있다. 트로이는 여러 차례 파괴되고 재건되었는데, 그 파괴의 흔적들 중 10년에 걸친 대전쟁에 의한 철저한 파괴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.[* 다만 이 부분은 10년 공성전이 아니라 9년 동안 여기저기 들렀다가 1년 동안 싸웠다고 본다면야...]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여러 차례의 파괴들 중 어느 것이 트로이 전쟁의 흔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. 더구나 히타이트의 문서에는 윌루시아(히타이트인들이 트로이를 부르던 이름)에 대한 기록이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이후에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다.[* 앞서 주장처럼 트로이가 지역 통상에 요긴한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면, 트로이가 몇 번 파괴된 뒤에 버려지지 않고 연이어 재건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.] 때문에 만일 미케네인들이 윌루사를 일시적으로 함락하거나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, 이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윌루사의 배후에 있는 강대한 [[히타이트]] 제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은 어려웠을 듯하다.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은 2차례 있었다.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것은 2번째 트로이 전쟁이고, [[헤라클레스]]가 트로이를 함락했다는 전설이 신화상으로는 그보다 한 세대 앞의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. 또한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공격해서 함락시켰을 때 트로이는 이미 [[포세이돈]]이 보낸 바다의 괴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. 트로이 유적의 흔적 중에도 이러한 신화상의 설명과 잘 들어맞는 듯한 부분이 있는데, 해일로 도시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가 복원되고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군사적으로 파괴된 (그리고 다시 복원된)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. 따라서 이 두 흔적이 바로 헤라클레스의 공격과 트로이 전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. 문제는 이 중 두 번째의 파괴의 흔적은 파괴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첫 번째의, 해일로 인한 파괴보다 오히려 정도가 약했고, 파괴 이후에도 더 빨리 복원되었다는 점이다. 즉 이 주장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지나치게 작은 사건이 되어버린다. 이 때문에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. 참고로 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~기원전 118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.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. 최근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1200~1150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인 후기 청동기 문명 붕괴와 연관지어, 신화와 기록으로서의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술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여러 번 진행되었던 공격과 몇 번의 점령, 최종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직후 [[바다 민족]]의 침공으로 [[미케네 문명]]이 멸망하여 그리스 암흑기가 찾아오게 된 후 팽배한 비극적 인식 등이 융합된 것일 것이라는 것이 많다. 위에도 언급되었듯 트로이는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며, 최종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[[바다 민족]]이 동지중해 지역을 휩쓸어 복합적인 청동기 국제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온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ate_Bronze_Age_collapse|청동기 문명 붕괴 사건]] 이후에 해당한다. 더군다나 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그리스 문명 역시 붕괴하여 수백년의 암흑기를 거쳤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